때는 점심시간 이후 딱 나른할 시간인 역사 수업 시간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어김없이 나른함을 못 이기고 깜빡 졸았을 것이다. 그런데 졸기만 할 것을, 이건 또 무슨 꿈인가? 최근 꾸는 꿈 중에 제일 생생한 것 같았다.
처음 보는 풍경에 처음 보는 옷차림, 많은 사람들 속에 껴있던 나는 내 바로 옆에 서있는 꽤나 세련되어 보이는 인물에게 말을 걸었다.
"여긴 어디죠? 너는 누구인가요?"
그렇게 말하자 그 인물은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꿈이라도 꾸시는 겁니까? 당연히 여긴 독도 제국이고 당신은 이 제국의 왕 되시는 분이시지요. 저는 그 왕의 충신이고요."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독도 제국이라니, 내가 아는 그 독도를 말하는 건가? 정말 유치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왕이라니.
나는 한참 동안 멍을 때리다가 문득 이 독도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져 밖으로 나가 구경이라도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벌떡 일어나니 옆에 있던 충신은 다급하게 말했다.
"폐하, 아직 쌓인 일이 이렇게 많은데 어딜 가시렵니까?"
그 옆을 슥 둘러보니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쌓여있는 종이 더미들이 보였다.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꿈에서까지 종이만 들여다보는 것은 싫었기에 손사래를 치며 도망치듯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저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아는 그 독도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던 독도의 몇 십 배는 넓은 땅에, 크고 작은 건물들,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시장, 항구와 물고기를 잡고 있는 고깃배들이 ㅡ 높은 언덕에 지어진 이 성에서는 모든 것이 한 눈에 보였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기분이 들뜨는 것 같았다. 정말 내가 이 곳의 왕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며 한탄하다가 푸른 잔디로 덮인 언덕을 거의 구르듯이 내려갔다. 때문에 내 화려했던 옷은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옷도 아닌데 뭐.'
나는 언덕을 내려오자마자 맛있는 냄새에 이끌리듯 쫓아가니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이 나왔다. 그리고 바로 앞에 호떡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방금까지 쫓고 있던 냄새의 주인은 이 호떡이었나 보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돈이 있으면 하나 사먹어야지, 왕이나 되는 사람인데 돈 한 푼 없겠어?'
그런데 아무리, 아무리 뒤져보아도 정말 돈 한 푼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고! 현실에서도 용돈 다 떨어졌는데 꿈에서조차 없으면 어쩌자는 거야!'
그렇게 한참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더니 호떡 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보시고 말을 걸었다.
"에구머니나! 이게 무슨 일이람! 왕께서 여긴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호떡이라도 잡수시렵니까? 제가 호떡을 잘하긴 합니다. 호호... 아, 혹시 이런 건 드시지 않으시려나요?"
잠깐 사이에 훅 지나가버린 말들을 나는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호떡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나는 호떡을 하나 받아들고 시장을 더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 꿈에서의 시장은 내가 평소 아는 시장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채소를 팔고 계시는 할머니, 큰 소리로 손님을 모으는 상인의 소리, 여기저기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온갖 길거리 음식들, 여유롭게 시장을 보고 있는 사람들까지. 내가 그 사이사이를 지나다니며 구경하고 있자니 사람들은 내 복장과 얼굴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길을 비켜주었다. 불편하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눈에 너무 띄어버리는 이 화려한 복장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가장 먼저 보이는 옷 가게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처럼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돈은 나중에 내기로 했다. 가게 주인은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런 건 내가 너무 악덕군주 같이 보일 것 같아 거절했다. 나는 모자까지 꾹 눌러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시장을 나와 거리를 살피니 작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나도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밖에서 애들이랑 그네나 타며 놀았었는데, 내가 놀이터를 그냥 지나쳐 가려 하니 아이들이 나를 불러세웠다.
"아저씨! 거기 공 좀 차 주세요!"
보아하니 공이 어쩌다 나한테 굴러온 듯 싶었다. '아저씨'라는 말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공을 살짝 차 주었다. 아이들은 나에게 감사하다고 외치고 나서는 다시 꺄르르 웃으며 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잠깐 벤치에 앉아 구경을 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과 같은 경보음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아이들은 놀라서 이미 집으로 들어가 버린 듯했다.
나도 서둘러 성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장의 물건들과 가게는 그대로였지만 사람이 없었다. 길거리와 언덕에도 사람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 같은 건 없었다. 내가 숨을 헐떡이며 성으로 들어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충신이 나와 나를 나무랐다. 갑자기 나가버리면 일은 누가 하냐느니 옷은 어디에 팔아먹고 흙투성이로 왔냐느니 하는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그렇게 우리 엄마를 닮은 충신은 한참 잔소리를 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지금 큰일이 나려 하는데, 왕께서 이러시면 심히 걱정이 됩니다.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맞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내가 방금 전 들은 사이렌 소리는 무엇이냐고 묻자 충신은 말을 이었다.
"정말 큰일입니다. 일본 제국이 지금 독도 제국을 탐해 정복을 목표로 바다를 건너오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평화롭기만 했던 이 꿈에서도 망치려고 달려드는 것에 신경질이 났다. 현실에서나 꿈에서나 독도를 욕심 내는 일본이 지긋지긋해질 것 같았다.
일단 나는 군대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나는 일본 제국에 대한 정보가 담신 서류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일본 제국의 왕이라는 사람이 바로 내가 현실에서 제일 싫어하는 녀석인 옆자리 '호승태'였던 것이다.
꿈에서까지 악역으로 등장하다니, 내가 얘를 엄청 싫어하긴 하나보다. 그런데 갑자기 좋은 생각이 스치듯 떠올랐다.
"여봐라! 군대와 함께 각종 개구리란 개구리를 모두 준비해놓도록 하여라!"
그것을 들은 신하들은 하나 같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왕의 명령이니 따르는 듯 싶었다.
그 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신하들이 준비해둔 전투용 갑옷으로 얼른 갈아입은 뒤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처음 본 광경에 놀라고 말았다. 대충 보아도 수십 척은 되어 보이는 배들에 일본 제국의 군사들이 빼곡히 타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보아도 우리의 군대보다 훨씬 많아 보이는 수였다. '그래, 그래도 우리에겐 수단이 있어. 꿈이니까, 꿈이니까 분명 먹힐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도중, 호승태, 아니 일본 제국의 왕이 외쳤다.
"독도 제국의 왕은 들어라! 내가 오늘 이 땅을 정복해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영광으로 알돌록 해라! 하하하!"
호승태가 저리 외치는 것이 꼴 보기 싫어 나는 서둘러 명령을 내렸다. 나는 일단 대부분의 군대를 앞으로 나가 싸우도록 하였고 이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나머지의 인원들은 개구리를 준비해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해야 했다.
"폐하! 압도적으로 저희 군대가 밀리고 있습니다! 폐하께선 도망가셔야 합니다!"
나는 조금 조급해졌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아직 항복은 이르다! 개구리 폭탄은 준비되었나?"
"아, 예... 옙!"
개구리 폭탄은 개구리들을 모아 만든 탄으로, 대포로 날려서 사용하면 될 것이다.
"준비된 개구리 폭탄을 모두 적의 배를 향해 쏘아라!"
내가 명령을 내리자 대포에서 일제히 개구리 폭탄들이 쏟아져 나갔다. 개구리 폭탄은 적의 배에 닿자 폭발하며 개구리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이런 터무니없는 무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호승태가 개구리를 죽도록 싫어하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개구리의 뒷다리만 보여도 헛구역질을 하며 도망가는 그였기에 저 일본 제국의 왕이 호승태와 같다면 틀림없이 내뺄 것이다. 그리고 역시 내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개구리가 여기저기서 뛰어다니니 적진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기세를 몰아 적을 더 몰아세워 공격하니 이에 호승태는 울먹이며 외쳤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 살려줘, 살려줘! 항복할게, 항복한다고! 이 개구리들 좀 치워줘!"
승리했다. 거창했던 것에 비해 간단하게 이겼다. 호승태의 약점이라면 다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꿈이었지만 이 독도 제국이라는, 나의 세상을 지켰다는 것이 매우 뿌듯했다. 이대로 깨지 않아도 괜찮겠다 싶던 그 순간 피곤이 밀려온 듯 스스륵 눈이 감겼다.
그러다가 눈이 탁 트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선생님의 수업 소리도, 애들이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교실은 단 한 명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5시 30분, 학교가 끝난 지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호승태 이 녀석, 옆자리인데도 깨우지 않고 그냥 가버리다니. 그래도 기분은 영 나쁘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좋은 꿈을 꾸어서 그런지 오히려 개운했다. '가는 길에 개구리나 잡아다 줄까? 좋아하겠네.'
그렇게 나는 킥킥거리다가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왔다.
- 김송현(안양 희망세움지역아동센터, 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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